손인식목사 연재 목회칼럼

손인식 목사 연재 목회칼럼 6회 '오, 인간이여' 2

 

오, 인간이여 (2)

 

1990년 12월 얼바인 베델한인교회에서 시작된 대 부흥과 성령의 돌탕역사는 실제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찿아보기 어려운 이민교회 역사의 한 큰 획이 되었다. 그 때까지 이름 하나 변변히 알려진 것이 없었던 돌탕출신의 내가 베델한인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할 때 성령께서 일으키신 이 부흥의 파도는 물길처럼, 불길처럼 넘쳐흐르며 구원받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소식들로 오렌지카운티 일대를 진동시켰다.

 

순식간에 예배 참석이 200명에서 1,000명으로, 2,000명으로 늘어났으며 주일설교 테이프가 미 전국으로 수천개씩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설교를 들으며 남녀노소 성도들이 줄줄 울고 찬양이 진동하고 헌금이 쏟아지며 교회를 찿아오는 새 신자들이 넘쳐흘렀다. 예배는 성령받고 변화된 사람들의 간증과 간증으로 이어졌고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용서와 화목이 이루어져서 교계신문 뿐 아니라 한국계 일간신문에까지 기사화 되었다.

 

북미주 각처에서, 한국에서 소문을 듣고 찿아오는 방문자들과 예배 참석자들이 왜 이렇게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나는지 분석도 하고 벤취마킹하겠다고 그룹으로 몰려오는 현상들도 일어났다. 한 마디로 성령 하나님이 아니면 허물덩어리에 불과한 한 사람의 인간목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적 사건이 터져나온 것이다.

 

솔직히 담임목사의 입장에서 떨리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와 함께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를 점검하며 대화하다가 수시로 엎드려 손을 잡고 기도했다. 그 당시 와싱톤의 형님 댁에 살고 계시던 어머니는 계속 들려오는 부흥의 소식을 들으며 한번은 전화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손목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놀라지 말거라. 네가 십 몇년 전에 성령받고 변화되면서 그렇게 몇 달을 울더니 이런 일이 터지는구나...”. 결국 어머니와 나는 전화를 붙잡고 함께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방심해서는 안되는 현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그 돌탕 부흥의 저변에 퍼져나가고 있었던 반 부흥, 반 돌탕, 반 성결운동의 돌덩이 같은 세력에 관한 것이다. 교회 전체가 입을 벌리고 놀라는 그 사도행전적 부흥과 기적의 현상들을 똑 같이 바라보면서도 전혀 달리 해석하고 거꾸로 반응하는 만만치 않은 세력들이 보이지 않게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같이 예배하고 같이 찬송하며 밀려드는 목마른 영혼들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못마땅하고 불쾌하고 즐겁지 않은 심리를 끌어안은 교인들이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 왜 그럴까? 그분들도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하면서 그렇게도 베델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목소리를 높여가며 간구하던 직분자들이었다. 그들도 인간이 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터져나오는 것을 분명히 눈으로 보며 감탄하고 감격해하던 교회의 고참 식구들이었다. 그런데 기도한대로 영혼들이 꼴을 먹고 춤추며 뛰고 즐거워하는데 왜 그것이 싫어서 얼굴들이 점점 화난 안색으로 변해가던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 속에 이미 소개되고 언급되었던 같은 종류의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이곳 저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돌아온 동생을 맞이하며 환영의 잔치소리가 온 동네를 덮는 흥분과 기쁨 앞에서 오히려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던 큰 아들의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과 같은 것이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에게 박수를 보내는 군중을 바라보며 함께 축제의 잔을 들 수가 없었던 사울왕의 예상하지 못했던 분노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며 성경이 보여주는 경고이며 성경이 선언하는 인간의 수준인 것이다.

 

변화에 대한 분별력


그렇다면 돌탕으로 묘사되는 엄청난 변화들은 무엇이었으며 불어닥쳤던 성령의 바람은 헛되이 불고 만 것인가? 우리가 그토록 환희하고 감격했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감격, 즉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선언은 처음부터 포장일 뿐이지 내용은 아니었다는 말인가? 물론 대답은 아니다. 세상도 건드리지 못하고 마귀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성령의 열매는 포장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사실 나 자신도 위에 말한 이중적 현상에 직면하면서 겪어야 했던 혼란과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양쪽이 다 처음 겪는 일들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성령이 임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회개와 부흥으로 파도치는 현상을 담임목사 입장에서 바라보는 일도 난생 처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못마땅하고 불편해서 안색이 변하고 눈빛이 싸늘해지는 일부 교인들의 반응도 초년병 담임목사로써 처음 겪어보는 첫 경험이었던 것이다.  

 

지난 23년을 돌이켜보며,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토록 번민하던 갈등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해내랴”하고 탄식하던 그 절규를 누군들 신앙의 순례길에서 겪지 않을 성도가 있겠는가?! 성직자이든, 직분을 받은 제직들이든, 남녀 그 어느 성도들이라도 선와 악 사이를 오가는 자신의 어처구니 없는 두 얼굴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돌탕의 강한 물결이 파도치듯 베델한인교회에 밀려들 때에도 두가지 세력 사이에서 충돌이 생기고 부딪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회로 치면 베델교회에서만, 지역으로 치면 얼바인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같은 성령의 폭발적 역사와 부흥을 겪고 있는 각처의 교회들에서도 어쩌면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의 사역자들은 피하지 말고 이런 상황들을 직면해야 한다. 지혜와 진실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아버지에게 대들던 큰 아들과 같은 교인들도, 교회의 부흥과 구원받는 무리들이 줄을 이어 생겨나는 것을 놀라워하며 성령의 일하심을 두려워하는 마음들을 갖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거부하고 싫어하며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종류의 큰 아들들까지 직시하며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주의 목회는 돌탕목회라고 하는 둘째 아들 중심의 시각만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돌탕목회의 다른 한 면까지 끌어안아야 한다. 큰 아들 신드롬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채 지금도 이곳 저곳의 많은 교회들 속에서 갖가지 부정적 역할과 목회 방해를 펼치고 있을지 모를 큰 아들 부류의 교인들을 안아주고 이해하는 것이다. 기다리며 멀리 보는 목회이다. 정죄하지 말고 십자가의 주님처럼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눅23:34)라고 가슴 아파하며 기다리는 것도 또 다른 한면의 돌탕목회인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부흥이 주께서 행하시는 일인 것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한채, 얼굴에 화난 기색을 띠고 부흥을 싫어하며 반대하고 목회의 비전에 초를 치는 일까지 서슴치 않게 하는 것일까?       

 

교만


교만이다. 말씀을 듣고 영혼이 기뻐하며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 시작하는 수많은 무리중에 함께 있다가도 어떤 교인들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두었던 교만과 자부심을 다시 터뜨리기 시작한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예배와 성령의 흐름 속에 처음에는 같이 기뻐한 것이 사실이지만 점차 교회를 이끌어가는 담임목사와 평신도 리더들을 향한 우월감이 솟아나오는 것이다. 대부분 특정한 직업, 전문성, 저명도를 누리는 교인들 중 에 이런 시험과 유혹에 쉽게 빠지는 비율이 높다. 내가 교회 밖에서는 전문성으로 언제나 중심적 인물인데 왜 교회 안에 들어오면 앉아서 듣기만 해야 하는가? 왜 나보다 나을 것이 없는 목사나 장로들의 인도를 받아야만 하는가? 교인들을 학생다루는 교수처럼, 환자들 다루는 의사처럼, 직원들 거느리는 기업체 사장처럼 우월감을 과시하는 교만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통제되지 못하고 흘러나오고 마는 것이다. 주 예수의 교회마저도 그의 전문성 잣대로 평가하며 목양사역과 목양자들을 자기 우월감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교만이 모든 복음 사역의 최대 적이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교회가 성령사역으로, 구원사역으로 왕성하든 말든 상관없이 폭발해 버리고 마는 것도 교만 때문이다.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친 직후 성가대석에 앉아있던 젊은 부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교회와 목사를 향한 무슨 불만을 터뜨리는 바람에 많은 교인들이 영문도 모른채 어이없이 바라봤던 때가 있었다. 안하무인이었고 남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치 않는 태도였다. 그는 자신의 교만을 억누르지 못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받은 은혜를 날려버리게 한 것이다. 그는 비록 사무실에 앉아 찿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으나 영혼 구원의 역사가 진행 중인 하나님의 교회에서까지 그런 진료행위는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런 권리를 교회도,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도 그에게 준 적이 없다. 다만 돌탕목회 현장에 와서 신앙의 성숙을 추구하다가 난데없이 돌출한 자신의 교만에 스스로 화를 입은 셈이 된 것이다. 

 

성격


하늘 아버지께 돌아온 돌탕들의 큰 잔치 마당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자기 성격 자체를 관리하지 못하여 잔치를 뒤집는 이런 저런 교인들의 소리가 한국과 미국의 각 교회에서 들려온다. 과격한 혈기와 성질을 제어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어느날부터 거친 활동을 시작하면 은혜, 기쁨, 사랑의 교회 공동체는 마치 광야처럼 써늘하게 변하는 것이다. 한번은 교회 내 부서별 배구시합이 열렸는데 한쪽에서 넘긴 볼이 out으로 잘 못 판정되었다고 다른 쪽의 집사님 한분이 화가 났다. 그 분노는 지금 그 배구경기가 성도들 간의 친교이며 화목이며 기쁨의 나눔이라는 개념 같은 것은 순식간에 날려 버리고 온도가 100도가 넘을 듯한 혈기로 폭발하고 말았다. 심지어 같은 교회의 원로급 안수집사님인 심판의 멱살까지 잡고 말았다. 그 한분의 혈기로 온 교회는 복음의 전진이 방해당하고 우스운 말로 몇일 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빠지고 말았다. 왜 그러는가?! 돌탕이 되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았던 세상에서 돌아와 하늘 아버지 집의 잔치 자리에 왔으면 성도답게, 구원의 예복을 입은 새 존재답게 그 혈기 정도는 등 뒤로 던져야 한다. 그런데 돌탕으로 변화되기 전의 그 폭탄같은 혈기를 다시 터뜨려야 하는가? 교회가 무슨 남대문 시장인가? 혈기 부리라고 깔아준 무대인가? 돌탕목회의 가장 큰 장점, 가장 풍성한 축복은 “온유한 자”가 되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다. 돌탕 목회는 온유한 천국시민들의 무대이다. 만일 이렇게 혈기를 누를줄 모르는 사람들이 장로가 되고 당회나 운영위원회 멤버가 되면 언제고 폭발할지 모르는 근심이 온 교회를 덮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 회중이 조심해서 직분자를 선출해야 한다. 
 
세력 다툼


교회가 큰 은혜의 소나기 속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성전 좌석이 모자라 보조의자들을 가져오느라 부산하며 파킹랏에서 안내하는 호르라기 소리가 쉴 사이없이 들려오는데, 어떤 교인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위험경고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다. 즉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는 것이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가 하는 세력 계산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교인들이 밀려들어 부흥하는 것은 담임목사의 세력만 키워주는 결과가 되지 않는가? 교회는 어디까지나 장로들의 것이요 당회의 치리 밑에 있으야 하는데 이렇게 부흥하다보면 장로들의 설 자리는 없어져가고 목사 좋은 일만 시키는게 아닌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들이 큰 아들 류의 불만과 원한이 되어 장로 몇 사람을 모이게 하고 그 모임은 점점 불어나 이 부흥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대책을 의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포도나무 되신 그분에게 접 붙여진 가지들인 것이다. 수없이 대표기도하면서 교회가 십자가에서 모든 죄값을 대속하신 독생자 예수에게 속한 것임을 얼마나 많이 외쳐왔던가?! 그런데 왜 그렇게 부흥이 싫고 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이 자신들의 세력을 위협하는 경고와 같이 느껴져야 하는가? 본당이나 파킹랏이나 사람으로 차고 넘치는 것이 결국 다 담임목사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굳혀버리면 그 생각을 바꿔놓기가 정말 힘든 일이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왜 새가족 환영회에 그렇게 음식 값을 많이 쓰는가? 왜 베델동산 다녀온 성도들에게 주일예배 시간에 간증을 시키는가? 왜 부목사 숫자를 늘려서 밀려드는 새 얼굴들을 정착시키려고 인건비를 늘리는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해가 안가는 비판이요 반대의견이었지만 그 밑바탕에는 누가 이 교회의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가에 대한 집요한 세력다툼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 당시 그런 과정들을 어떻게 헤치고 여기까지 왔는지 성령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끝내 베델한인교회는 담임목사의 교회도 아니며 장로들의 교회도 아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확고하게 세워졌다. 할렐루야!

 

섬김의 반대급부


돌탕의 수많은 열매들이 맺혀지는 가운데 뜻밖의 현상들을 볼 때도 많았다. 교인들 가운데는 병들어 몸이 쓰러지거나 어처구니 없는 사단의 시험에 빠질 때도 많다. 갬블링에 빠져 집안의 남은 돈들을 싹슬이 해서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경우들도 있어서 새벽 1시에 달려가 그를 거기서 빼내오는 때도 있었다. 불륜이 터져 가족들이 다 풍비박산이 날 상황이 왔을 때 그저 줄줄 울면서 막아서고 돌아서게 하고 멀쩡한 유부남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어 천신만고 끝에 그 가족을 구해내는 경우들도 있었다. 목양의 한 측면이다.  암이나 심장 질병등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채 두려워떠는 교인들을 참으로 수도 없이 병원으로 찿아가고 집으로 방문하고 수없이 기도하고 신앙적 가이드라인을 베풀어 주었다. 어떤 여성은 키모테라피의 그 독한 약기운으로 살색이 꺼멓게 타버린 처절한 상황에서 그의 병원 침대 모퉁이를 붙잡고 한번만! 주여! 한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이집에 두 아이에게서 엄마를 데려가지 마옵소서...하고 부르짖던 이 담임목사를 본인이 희미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기억이 남아있다.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고 지금 갖가지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것은,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섬김을 받은 분들 중에 별 것도 아닌 교회 일로 갑자기 내게 적대하기 시작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분들을 여러 번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고마워하고 심지어 목사님의 사랑과 기도가 없었으면 지금 이렇게 살고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여러번 사람들 앞에서 공언하던 분들인데 처음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배경을 터득하게 된 심정이다. 굳이 말하자면 섬김의 반대급부인 것이다. 그런 위기들을 지나가며 가장 약하고, 부끄럽고, 보이고 싶지 않던 가족사의 부분들을 부득이 보여야 했던 그 사실이 어쩌면 담임목사인 나를 보기에 자연히 꺼끌스러웠던 것은 아닐지, 오히려 자기방어적인 심리상태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지,...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인간으로 등에 칼이 꽂히는 것 같은 씁쓸하고 절망적인 느낌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그 역시 내 기억 속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여전히 세상에서 돌아오는 둘째 아들들은 줄을 지어 아버지 품으로 찿아오고 있고 그 보람과 기쁨은 다른 모든 것을 충분히 덮을 수 있는 위력이 있기 때문에, 목양에는 그런 일들도 포함된거야! 하고 주의 말씀을 전하러 강단에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태생적 반골


교인들 중에는 잘 믿고 열심히 믿고 교회를 좋아하고 교회 일이 있다고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교회로 달려오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반면에 그분들 중에는 특이한 교인들이 있어서 목회 초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던 성향을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열심히 주를 믿고 섬기고 교회 일에 앞장서다가도 무슨 의견이 나오거나 교회의 리더들이 제시하는 아이디어들이 나오면 이상하게도 반대부터 앞세우는 것이다. 다들 좋다고 하는 자리에서 꼭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나서는 경우인데 그분은 전에도 그랬고, 다른 일에도 그랬던 분이다. 아마도 자기 자신도 그런 경향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일종의 태생적 반골이다. Yes보다 No이며 순종보다 불순종이고 합의보다는 의문을 꼭 보태는 성향이다. 집에서도 부모에게 그런 경향을 보였고 학교에서 교수에게 그런 반골을 보였을지 모른다. 직장에서도 그런 성향을 멈추지 않아서 다른 직원들을 늘 편안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그런 반골 기질일 수 있다. 그러니 돌탕으로 주님 품에 안기고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태생적 반골성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케이스들이다. 본인들은 테이블에 올라온 의견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일 뿐이라고, 누구나 자기 의견이 있는 것 아니냐고, 스스로를 정당화 할 수 있지만 많은 케이스들을 겪다보니 그건 생산적 의견이기보다 부정적 저항이며 반항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회의를 하기 위해 둘러앉았을 때, 반대 의견을 시작하거나 안 받아들이기 위한 논리의 발언을 하고 있는 교인들을 보면 또 그 사람이고 또 그 스타일인 것이다. 심지어 그분들과 미리 얘기도 나누고 회의에 올리기 전에 의견을 먼저 들어보며 조정을 해보는 노력도 많이 했지만, 막상 회의를 시작하면 자기 자신이 사전에 제안했던 그 의견마저도 또 반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조건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태생적 반골이라는 묘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돌탕 목회에 불어닥치는 성령의 바람은 그것마저도 덮어주셨고 막아주셨고 나머지 태생적 동역자들이 그들마저 끌어안게 만드셨다. 오직 성령이 하시는 성령목회를 의지하는 것이 목양이다.    

 

밥 한끼


교회가 한창 힘을 얻고 소문이 나며 영적 변화의 사건들이 줄을 이어 나타날 때, 또 한편에서는 밥을 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밥 한끼를 대접하며 친분을 쌓고 내 사람으로 만드는 효과를 보는 것이다. 동창이라니까 밥을 먹을만하고 같은 셀교회에 속했으니 식사 한끼 나눌 수 있으며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같은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것도 훌륭한 식사 초대의 명분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밥 한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교적 교회에 새로 오기 시작한 그분들에게 유창한 언변으로 자신의 신앙 경륜을 소개하고 교회 초기부터 얼마나 헌신과 봉사를 쏟아서 오늘의 이만한 교회가 되었는지를 인상 깊게 그분의 심중에 심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인간관계가 보통이 아니다. 마치 사관학교 생도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친구관계, 신뢰관계, 상하관계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교회 내에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믿음의 형제들이 있어야 하고 또 좋은 믿음의 cycle을 만들어 신앙이 더 깊어지고 좋은 영향력을 피차에 나누도록 강조하기도 했다. 문제는 어느 시점에 와서 교회내에 뜻이 갈리고 생각이 달라질 때 그런 친분관계는 생각지도 못했던 역학관계, 압력그룹등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편이 갈라지고 패가 나뉘어질 때 밥 한끼와 커피 한 잔을 나눈 것이 그렇게 큰 영향을 주는지 놀라고 또 놀랐다.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객관적 판단보다는 누구와 친해지게 되면 그 사람의 논리와 주장을 무조건 따라가게 되는 주관적 이해관계가 앞서게 된다. 거의 무조건 그 편에 서고 그 말을 믿고 그 루머를 받아 들인다. 담임목사가 매월 봉급 받는 것 외에 1년에 약 100만불 이상 교회 돈을 가져간다는 말도 안되는 루머가 돌았을 때 너무 놀랐던 것은 그런 루머에도 놀랐지만 그런 소리를 믿어버리는 교인들이 있더라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목사의 삶, 투명성, 그리고 재정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철저한 처신을 뻔히 알면서도 밥 한끼 잘 사며 속삭이는 그 누군가의 말을 믿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도 몇 년이 지나서야 자기가 그럴싸한 속임수에 속았다고 주변에 고백하였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 몇 년이 더 어이가 없는 시간소요였다. 몇 년을? 담임목사가 교회 돈을 빼내어 100만불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그렇게 오래, 몇 년씩이나 믿고 있었고 몇 년이 지나서야 양심선언을 했단 말인가? 오, 인간이여!! 사람을 향한 진한 환멸과 절망감을 나 역시 몇 달은 겪어야 했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시작된 죄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있었고, 그보다 더 끔찍한 죄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십자가 위에서 흐르지 않았던가?! 지금도 밥 한끼를 나누자고 제안하는 그 어떤 교인이 있을지 모른다. 열이면 열 다 좋은 성도의 교제가 되겠지만 그중 하나라도 다른 의도가 있는 느낌이 보이면 그대로 집에 가서 아내가 끌여주는 김치찌개를 먹는 것이 훨씬 영적 security를 지키는 길이 될 것이다.      

 

오 인간이여!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 안에서 새 사람된 놀라운 감탄이 있는가 하면, 오 인간이여! 하며 환멸과 실망을 쏟아내게 만드는 두 가지 양면이 언제나 나뉘어진다. 특히 돌아온 탕자, 즉 돌탕들이 베델한인교회를 채우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영적 변화의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면 정반대로 끔찍하고 파괴적인 사단의 역사들이 중간, 중간 터져나오기도 한 지난 세월은 한 편의 영화를 찍은 것 같은 감회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환희와 슬픔, 자부심과 수치, 성령의 일과 사단의 일들이 교차하던 23년의 베델한인교회 담임목사 생활은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이 돌탕 목사에게 무대를 맡겨주신 23년 짜리 영화였다고 뒤돌아 보게 되고, 이제는 다른 목회자에게 베델한인교회의 무대를 맡기셔서 주님의 사역들이 계속되게 하신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