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인식목사 연재 목회칼럼

UTD-KCC 국제대표  손인식 목사의 목회철학
...돌탕목회 이야기들!
...한국의 유명저널 "월간목회"에 연재되는 칼럼 
 ............................................................................................................ 

 

돌탕목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목회는 담임목사의 태도 하나로 방향과 흐름이 정해지는 경향이 강하다. 한 사람의 목사가 돌탕 즉, 돌아온 탕자라는 태도를 가슴에 품고 목회현장에 섰을 때 시작되는 흐름은 “내가 목사 된 것이 전적 은혜”라고 하는 생동적인 흐름이다. 나 같은 인간이 목사까지 될 수 있다니?! 나 같은 수준의 인간에게는 목사 된 자체가 감지덕지할 하나님의 특혜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다른 이유와 배경을 다 제치고 돌탕목사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만일 학식이 많아서, 많은 책을 펴낸 저자여서, 유명학교 출신이어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지배한다면 정말 어이없는 waste에 불과할 뿐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를 그 정도의 틀(frame)안에 묶을 수 있는가? 돌탕 목회라는 개념은 철저히 다른 것이다. 무조건 팔 벌리고 받아주신 주님을 향해 더 늦기 전에 깨닫고 무너지고 돌아서고 속물 됨을 버린 한 목사의 “바로서기”의 목회개념인 것이다. 돌탕목사의 필연적인 겸손이다.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히 거기에 따른 목회 태도와 의식으로 교인들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이 돌탕목회인 것이다. 
 

종교의 껍질을 벗겨내는 돌탕목회
 
 내 나이 42세에 베델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직면해야 하는 가장 높은 벽은 신학해석이나 교회부흥 또는 복음전파의 장벽이 아니었다. 가장 높은 목회의 벽은 한 마디로 교인들, 특히 기존 교인들의 기득권 의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모든 담임목사 초년병들이 마주치는 높고 견고한 성벽과 같은 것이다.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담임목사까지도 좌지우지 하려는 몇 사람들, 교회가 교회되는 본질에는 상관없이 자신의 기득권을 목숨처럼 붙잡으려는 소위 평신도 직분자들,.. 아마도 이보다 높은 목회현장의 벽은 없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과 가까워지거나 아니면 열정으로 그 벽을 뚫어보려고 갓 부임한 담임목사들이 힘써보지만 벌써 오랜 기간 지배의 맛을 누려온 그들을 견뎌내기가 정말 만만치 않다. 문자 그대로 그 교회의 20, 30년 역사 속에 살아있는 신앙이 아니라 종교화된 껍질이 각질처럼 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누구보다도 주의 나라를 목말라 하고 처음 주님과의 사랑으로 유턴(U-turn)해보려는 깊은 속마음들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기득권층에 속한 교인들이었다. 그런 이들도 처음 주 예수를 만났던 첫사랑의 기억이 의식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마치 디베랴 바닷가의 베드로와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들이야말로 돌탕목회의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역력히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이 종교의 껍질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신앙의 속살을 살려내는 성령의 역사가 터져나오는 데는 돌탕목회보다 더 효과적인 목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담임목사의 내려오기
 
모든 것이 담임목사하기에 달렸다는 확신이 24년 전 베델교회 담임목사로서 돌탕목회를 시작할 때 나의 의식이었다. 명함도 안 만들었다. 담임목사 주차구역을 없앴다. 교인들을 깊이 머리 숙이며 맞아들이고 안아드렸다. 밥 먹는 줄에 섰을 때에도 굳이 교인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순서대로 섰다. 권위에서 내려오고 의자에서 내려오고 자존심에서 내려오기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힘들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돌탕목회의 분위기와 흐름은 어차피 담임목사의 내려오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몇 가지 제스처로 순수 목회자인척 기망하자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 주님이 가장 본보기가 아니신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보좌에서 “내려다보기”가 아니고 십자가에까지 “내려오기”였던 것이다.
나 같은 돌탕을 때리지도 않으시고 죽이지도 않으시고 그 많은 죄에 불구하고 다시 맞아주셔서 반지까지 끼워주셨는데 좀 내려오면 어떤가!, 좀 망가지면 어떤가!, 교인들하고 같은 눈높이로 서는 것쯤 뭐가 문제인가!, ‘내가 목사인데!’를 의식 속에서 얼마나 버리는가 만큼 돌탕목회의 물줄기는 더 멀리 흐를 수 있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런 담임목사의 “내려오기”를 가장 좋아하고 반가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교인들이었다.

 

 
돌탕목사의 교인들 위로하기
 
강한 사람은 강한 사람들과 만났을 때 일이 난다. 부딪치고 쇳소리가 나고 쪼개져 버린다. 돌탕목사는 굳이 자기를 잘났다고 앞세울 이유가 없었다. 잘나봐야 그게 그것이다.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다. 돌탕목사인 나의 깊은 속마음에는 그저 담임목사로 한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강한 목사가 되어 교인들이 내 앞에서 주눅 들게 하는 것이 목회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어차피 교인들의 집인 것이다. 교회 입구에서, 강단 위에서,교인들 앞에 이 담임목사가 날이 선 칼을 들면 분명 다 흩어지고 말 것임을 또렷이 예단할 수 있었다. 담임목사인 나의 최대 목회무기는 위로였다. 물처럼 흐르며 교인들과 그들의 아픔들을 감싸 안았다. 그래서 돌탕목사는 울기에 바빴고 안아주기에 바빴다. 왜도 그렇게 끝없는 문제의 홍수 속에 헤엄쳐 다니는 교포교회 성도들의 삶이 되고 있었던지, 어떤 때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것을 생각하며 나 혼자 눈이 벌겋게 울었다. 얼마 안 가서 교인들로부터 따뜻한 위로의 언어들을 오랜 이민생활, 교회생활에서 처음 들었노라고 하는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두터웠던 자존심과 지배의식과 종교껍질들이 위로의 따스한 온도와 눈물 앞에서 벗겨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주님의 마음으로 위로하면 그만이었다. 나머지는 자기들이 눈빛이 달라지고 얼굴색이 달라지고 웃음무늬가 달라지며 성령 안에서 치유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아도 엄청 보았다.

 

 

돌탕들의 베델동산

 

돌탕목사의 섬김과 위로 속에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이 갑자기 불어나는데 문제는 숫자라고 하는 물리적 제한이었다. 한 사람씩 섬기면 오죽 좋으련만 어느 세월에 밀려드는 교인들을 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섬길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때에 생각하게 하신 것이 위로하고 씻어주고 껍질 벗겨내는 그릇을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였다. 마치 푹 익게 하는 성령의 목욕탕을 만드는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 중의 하나가 베델동산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돌탕목회의 본질과 성격에 비춰볼 때 베델동산 이상으로 잘 맞는 사역은 없었을 것 같다. 2박 3일 동안 레이크 엘시노 국립공원 호숫가 언덕 위에 있는 수양관으로 보통 45명에서 50명 정도의 참가자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을 섬기는 봉사자들은 100명이 넘는 두 배의 숫자였다. 산에 올라 수양관으로 들어갈 때마다 입구에서부터 참가자들은 큰 충격과 흥분에 빠졌다. 두 줄로 나눠 서서 뜨겁게 박수치며 맞아들이는 봉사자들, 명찰을 찾아 걸어주며 힘껏 끌어안는 포옹, 눈이 확 열리게 장식한 만찬자리의 풍성함, 찬양을 끌어가는 찬양 인도자 뿐 아니라 중간 중간 봉사자들이 아예 테이블 속으로 걸어 들어가 어리둥절 앉아있는 참가 형제나 자매를 끌어안고 함께 찬양하는 무조건의 풀어짐 속에서 참가자들은 그동안의 상식을 깨버리는 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의 진정한 만남을 누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분 앞에 엎드렸다. 한 사람의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전율을 겪으며 눈물이 터지고 마음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23년이 지나 작년 말로 은퇴하기까지 88차에 걸쳐 이 베델동산은 계속되었다. 수천 명 이상의 남녀 성도들이 주님과의 첫 사랑으로 돌아오고, 담배와 술과 도박이 끝나고, 부부들이 달라지고, 충돌과 상처입힘과 지배욕구들로 얼룩졌던 소위 종교행위들이 썰물처럼 물러가기 시작하는 것을 온 교회가 지켜보았다.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새로운 돌탕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돌탕목회는 웃게 하고 울게 했다.

 


돌탕목회의 새 언어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언어가 달라진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이 시키는 말들이 쏟아진다. 마찬가지로 돌탕목회가 시작되면서 베델교회는 전에 없던 새 언어들이 예배 시간에 넘쳐나고 성도들의 대화 속에 들려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성경의 말씀(고린도후서5:17)이 언어를 통해 분출되는 현상이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제일 먼저 성도들을 맞이하는 첫 마디가 “참 잘 오셨습니다”였다. 생각할수록 돌탕들이 되어 주님의 집으로 온 것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입니다”라는 표현도 수없이 선포되었다. 사람들 속에서 당하고 겪고 배반당한 인간 불신들이 돌탕의 변화 속에 사람을 사랑할 대상으로 새롭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표현들로 바뀌는 것이다. 틈만 나면 “합니다” “됩니다”를 교인들과 주고 받으며 기도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나누었다. 영어 표현으로도 “God is good!"하고 담임목사인 내가 외치면 베델성도들은 ”All the time"이라고 외치며 예배를 시작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다시 내가 “All the time"하고 외쳐서 성도들이 ”God is good!"하고 되받아 외치게 만들었다.

 


언어는 속마음의 표현이며 분출구이다. 돌탕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기 관리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돌아온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 선포하는 것이다. 자기 입으로 선포한 말이 자기 인생에 시작된 변화와 믿음을 매번마다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기도하면 됩니다”라고 하는 선언도 아마 수 천 번은 모든 베델성도들이 외쳤을 것이다. 그렇게 외치게 할 뿐 아니라 예수께 돌아온 기쁨으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은 돌탕들이 보이면 주일예배 시간에, 베델동산에서, 심지어 실행위원회에서 간증하게 만들었다. 선교를 갔다 오고, 베델동산에 갔다 오고, 주일학교 어와나 경기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성도들을 등을 밀어내어서라도 회중 앞에 서게 하고 ‘나 같은 돌탕이 이런 사람으로 변했다!’ 고 하는 간증들을 말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한 교회가 예수님의 구주되심과 능력과 그분의 사랑에 관한 언어들로 가득 차게 하는 역동성이 되고 있었다. 돌탕목회는 숨기고 잠잠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목회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해 말도 많고 걱정도 많다. 그러나 그런 말들로 교회를 염려하고 성도들을 비난해봐야 무슨 해결이 있겠는가? 더 이상 예수에 관한 마음과 언어가 식어버린 문제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교회의 중심이 되게 하고 그분에 대한 언어와 간증들로 교회들을 넘치게 하는 길 밖에 없다. 담임목사들이 돌탕의식으로 돌아서고 성도들이 돌탕교회에 다니게 하는 길이 한국교회가 받아야할 처방이다. 그 길 밖에는 해결이 없는 것이다. 돌탕이 따로 있겠는가? 발버둥 치며 예수 품을 뿌리치고 나갔다가 결국 다 망하고 다 지치고 다 병들어 거지같은 꼴이 된 형편에 다시 예수 품에 안기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는 그것이 돌탕목회이지 그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23년 전 얼바인의 베델한인교회 돌탕목회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의 유명저널 "월간목회"에 연재되는 손인식 목사님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