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인식목사 연재 목회칼럼

돌탕목회의 영향력과 영향권 - 1

 

1992년쯤부터 돌탕교인들이 생겨나 놀랍게 변하고 있는 교회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베델교회는 점차 돌탕교회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불리기 시작한 크리스천이라는 호칭처럼 남들이 불러주는 호칭이었다. 안디옥의 예수 제자들 중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고 다닌 교인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을 보고 안디옥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또는 ”저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다“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 호칭으로 부르게 된 배경에는 저들은 좀 유별난 사람들이다, 예수를 유난히 표 나게 따르는 자들이다 등등의 약간은 비꼬는, 그러나 다른 면으로는 특별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긍정적인 양면이 들어가 있는 이름이 된 것이다. 베델교회의 돌탕들과 돌탕목회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별나다고 은근히 경계하면서도 예수 믿는다면 저 정도는 돼야지 하는, 그래서 궁금해 하고 기대를 거는 그런 눈길이었다. 물론 베델교회 경우에는 처음에 돌탕이라는 단어가 돌아온 탕자를 줄인 호칭이라고 교인들끼리 웃으며 사용할 정도였지만 그것은 곧 주변 교회와 사람들, 불신자들까지도 베델교회를 부르는 호칭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1. 돌탕목회의 영향력과 영향권
  돌아온 탕자, 즉 속된 말로 “헤까닥”하듯이 변화되는 크리스천들은 필연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주변에 끼치기 시작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이 곧 영향력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신앙의 영향력 때문에 관심을 달구며 신앙의 영향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영향력 때문에 돌탕은 돌탕을 낳게 되고 교회는 돌탕교회라는 이름으로 소문나기 시작한 것이 92년 봄이다. 그리고 돌탕목회는 사방에 영향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2. 부부 사이
 나 자신이 돌탕이 된 삶의 “헤까닥”은 제일 먼저 나와 아내의 부부 사이에 가장 강렬한 영향력을 끼쳐주었다. 1977년 부활절 새벽, 워싱턴의 포토맥 강가에서 열린 워싱턴 지역 한인교회 부활절 연합새벽예배 시간에 성령님이 내게 오셨다. 내 감춘 속마음을 열게 하시고 쓰러져 울게 하셨다. 탕자보다 더 추하고 역겨우며 불쌍한 나 자신을 스스로 보게 하셨다. 내가 바로 탕자였다. 결국 연합새벽예배 중에 나는 걸어 나왔고, 그 청명한 부활절 아침에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마음은 환희에 차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이상하게도 생각은 집에 있는 아내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뜻밖의 충동을 느끼며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이혼하기로 합의까지 할 만큼 서로 얼굴도 안 쳐다보던 그런 사이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아내가 제일 먼저 보고 싶어 달려간 것이다. 지금도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돌탕들이 보이는 공통적 현상인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창가의 소파에 힘없이 앉아있던 아내를 보았다. 그 순간 주저하지 않고 걸어가 아내의 두 손을 붙잡으며 불쑥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힘들었지” 그 말이 다였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아내가 그 다음 순간 어깨를 들썩이며 물줄기처럼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을 적시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이 우리 부부의 실질적인 결혼식이었다. 이혼이고 상처고 하는 소리가 없어진 것이다. 결혼 한지 얼마 안 되서부터 남편에게 학대받고 상처 입었던 내 아내, 미국에 건너와 직장과 대학 공부를 겸하며 심한 언어적 한계와 절망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아내를 괴롭히던 남편인 나, 그 아침 거기 있던 남편과 아내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었던 상처투성이 인격이었는데 하나님은 성령이라는 의사를 우리 두 사람에게 보내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품에 진정으로 안기며 돌아온 우리 부부를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고치기 시작하셨다. 돌탕이 되며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된 첫 번째 영향권이 바로 우리 부부 사이였던 것이다.
   지금도 돌탕이 되어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온 교인들의 가장 큰 변화는 부부 사이에서 발견된다. 남편이나 아내가 돌아온 탕자가 되어 새 웃음과 새 눈물을 시작하면서 곧장 자신의 배우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지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베델교회 교인들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교회 파킹랏에서 담임목사인 나를 마주치면 말은 못하고 눈물부터 솟구치던 성가대원 한 사람은 그 남편의 모진 성격과 차가움에 지난 세월이 너무 아팠던 여성이었다. 그런데 모태신앙이었던 이 남편이 뜻밖에도 말씀과 예배 중에 한 순간 뒤집어 진 것이다. 라틴어로 부흥이라는 단어가 revisitation of God이라는 뜻이 있듯이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 문화에 젖어있던 그 남편을 하나님께서 재방문해 주신 것이다. 이 남편은 오래 전 담임목사인 내가 겪었던 그 눈물, 고백, 돌아섬, 새 옷으로 갈아입음을 똑 같이 체험하며 돌아온 돌탕이 되었고 그 영향력은 당장 자기 아내에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그의 아내가 그렇게 바뀌는 것인지, 마치 “재대신 화관을”..하는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환한 웃음으로 재 대신 화관을 머리에 쓴 꽃처럼 얼굴이 변하는 것이었다. 돌탕으로 돌아선 이 남편이 한숨과 눈물뿐이던 그 아내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모른다. 다만 돌탕으로 변하여 주께 돌아오면 공통적으로 부부 사이가 달라진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교회의 한 구석에 손님처럼 드나들던 그 남편은 아내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내었고 지금은 베델교회의 장로가 되어있으며 그분이 주일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하는 날은 부흥회처럼 뜨겁다. 
   

3. 부부동산 
 그 여세와 힘을 모아 베델교회는 부부동산이라는 새 사역을 시작하였다. 해외 한인교회 중에는 처음이었다. 호숫가의 아름다운 수양관을 세내어 2박 3일간 참가를 원하는 부부들을 초청한 것이다. 수십 쌍의 부부들이 함께 어울리며 부부 사이에 높아졌던 상처의 벽을 허물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강의 듣고,..끌어안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는 문자 그대로 부부 힐링이 시작되었는데 이 사역 하나가 한창 폭발하듯 성장하던 베델교회 전체에 미친 영향력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돌탕목회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권은 가정이며 부부 사이고 지금도 이 부부동산은 베델교회에서 계속되며 부부들을 살려내고 있다.
   

4. 제직 선출
  돌탕 정신이 기반이 된 베델목회는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매해 교회 성도들이 뽑는 제직선출이었다. 어느 교회나 대부분 제직을 선출하면서, 특히 그중에 장로 선출로 인하여 마음이 갈라지고 교회 분위기가 험악해 지는 양상을 보인다. 부임해 보니 베델교회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돌탕목회가 펼쳐지면서 제일 먼저 달라진 영향권이 제직선출이다. 교인들을 향해 돌탕목회의 이름을 걸고, 직분을 권세로 알거나 명예로 삼는 폐단을 멀리하자고 도전했다. 돌아온 탕자들이 되어서까지 교회에서 고집부리며 주인노릇 하는 욕심을 앞세울 수는 없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이제부터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를 섬기자는 돌탕개혁을 꺼낸 것인데 예상과 달리 반대하는 교인들이 없었다. 나도 놀랐지만 교인들이 더 놀랐다. 예를 들면, 제직을 선출하는 과정부터 달라졌다. 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를 선출하기 전에 먼저 본인들에게 설문 자원서를 보냈다. 본인이 스스로 자기 신앙이 정말 예수 앞에 돌아온 성도답게 살고 있는지 점검하며 설문지에 후보 여부를 자신이 적어서 제출하게 하였다. 뜻밖에도 장로 선출의 설문지를 받고 나는 아직 돌탕처럼 온전히 주께 돌아오지 못했다고 후보를 포기하거나 다음으로 연기하겠다는 집사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이것은 한인교회들의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돌아온 탕자의 입장에서 이 모든 은혜를 어찌 다 갚을까 하는 겸손과 낮아짐이 장로, 안수집사 자리를 사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장로 선출을 두고 다투는 일이 없어졌다. 속된 말로 삐치는 일도 없어졌다. 피택이 안되어도 내가 아직 돌탕이 못되고 “들탕”(들 돌아온 탕자)이기 때문이라고 자인하면서 받아들였다. 장로 선거에 이름이 올라 심지어 4번, 5번씩 탈락되어도 교회에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는 이상한(?) 교회가 되었다. 아버지가 주신 것 다 탕진하며 온갖 추잡하고 교만한 인생의 전반부를 보냈던 탕자 주제에, 다시 그 분의 품에 안아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데 왜 장로선거에 울고 불고 하겠느냐는 태도였다. 더욱이 교인총회에서 직분자들을 선출할 때 이 돌탕교회 성도들은 내내 웃기에 바빴다. 사회자인 나 자신이 교인들을 독촉하면서 투표하는데 왜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느냐, 후보에 오른 사람들이면 그만한 자격 없겠느냐, 그저 이런 일꾼들 주신 것 감사하면서 빨리 빨리 찬성표를 찍어 계수위원들에게 주라고 하는 나의 거침없는 코멘트는 때로 폭소거리가 되었고, 오히려 교인총회는 잔칫집 축제처럼 되었다. 그러다 보니 베델교회 장로님들은 어떤 자리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제가 000장로입니다“하는 자기소개보다 ”제가 000입니다“하는 소개가 많아졌다. 명예보다 은혜가 앞선 것이다. 돌탕목회는 직분선출을 직접적 영향권 안에 두게 된 것이다. 
   

5. 목회자들의 자세
돌탕목회가 각 분야에 영향을 끼치면서 나타난 것 중의 하나가 교회를 섬기는 자들의 허영을 없애고 예수 제자답게 자세를 바꾸게 하는 영향력이다. 이것은 목사들에게나 평신도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어느 교회나 파킹랏에 담임목사, 원로목사, 부목사들의 파킹랏이 따로 표시가 되어있다. 42살의 젊은 나이에 돌탕 중의 돌탕이었던 내가 베델교회 담임목사로 왔을 때 나의 눈길은 성전 바로 앞, 제일 좋은 자리를 잡은 담임목사 파킹랏을 주목하게 되었다. 마치 그 자리에 차를 세우는 것이 특혜로, 특권으로 비쳐지게 될까봐 두려워졌다. 내가 어떤 주제의 인간이었는데, 내가 탕자의 거지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은혜를 받았는데, 꼭 이런 자리에 담임목사 차를 세워야 하는가? 더구나 나는 이제 40을 넘긴 한창 때 나이인데 60대, 70대 노인들에게 양보해 드리면 안 되는가? 대충 그런 생각이 들어 담임목사 파킹랏 표시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나중 내가 나이가 들면 몰라도 지금은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들어오겠다고 광고 시간에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다. 왜 그러느냐는 표정보다 은근히 좋아하는 교인들의 표정이 많았다. 그런 자세를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짐작한다. 내려오는 태도, 낮아지는 자세, 교인을 높이려는 의도,..이런 느낌들이 좋은 것이다. 
   
한번은 서울에서 내 중학교 동창 윤형주 장로가 와서 간증과 찬양집회를 하게 되었다. 집회 전에 식사를 대접하고 교회에 와보니 어느새 가까운 데는 파킹랏이 하나도 없었고 저 끝에 한 자리를 간신히 찾아 파킹하고 둘이서 숨 가쁘게 성전으로 걸어갔다. 성전 입구에 담임목사 파킹랏 표시가 페인트칠로 지워진 곳을 지나가는데 우리 두 사람 앞을 걸어가던 이웃 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바로 뒤에 가던 내 귀에 들렸다. “이 교회는 담임목사 파킹랏을 지웠대”...그 말에 응답하는 또 다른 사람의 코멘트가 내 귀에 꽂혔다. “그거 다 쇼야 쇼!” 그 순간 내 피가 멎는 것 같았다. 마음으로는 “그게 왜 쇼야, 그거 쇼 아니야”..하고 받아치고 싶었는데 차마 그렇게 못했다. 그 다음 순간, 그분들의 반응이 왜 그런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흥하면 목회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교회가 알려지면 목사들의 위상이 달라진다’, ‘교회에 성도들이 몰려들면 목사에게 권위가 붙는다’... 라고 생각하는 부정적 시선이 평신도들에게 보편화된 것이다. 
사실상 돌탕들의 가장 큰 시각적 변화는 낮아짐이다. 겸손의 회복이다. 어디가나 큰소리 치고 자존심 앞세우던 자세가 없어져가고 그 대신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을 시시때때로 보게 되는 습관이 생긴다. 마치 칼빈의 “신전의식”과 같은 경건과 새 의식이다. 그러므로 돌탕목회의 영향력은 목사부터 시작하여 교인들의 교회생활,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자세부터 고쳐지도록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6. 아버지들이 달라졌다! 
  돌탕목회가 강렬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영향권 중의 하나가 돌탕으로 변화된 아버지들의 태도이다. 예수님께 돌아와 죄의 숯덩이를 닦아내고 거지같은 세상의 옷을 벗어버린 후 가장 크게 달라지게 된 것은 자신의 가정을 보는 눈이고 특별히 자식들을 향해 눈뜨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해외 이민생활에서 직장과 교회와 가정 사이를 오간 성실한 성적표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돌탕의 심정으로 새삼 보게 되는 아버지로써의 점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자녀들에게 할 말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 아들 딸 앞에서 본이 되었나, 관심을 가졌나,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했나, 기도 한번 제대로 해주었나, 아이들 앞에서 부부가 싸우며 고성까지 지르지 않았나... 생각해 볼수록 주님께 돌탕으로 돌아와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 실패라고 하는 성적표인 것이다. 이런 자각 가운데 돌탕이 된 아버지들 중에는 심지어 대학생인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아버지까지 생겨났다. 아빠 엄마의 숱한 부부싸움에 깊이 상처 받은 중학생 딸 앞에서 자신의 변화를 고백하고 그 상처를 싸매주며 행복한 가정을 약속한 아버지도 있었다. 그 당시 전 베델교인들에게 “비전 선언문”을 가정별로 작성하여 품에 넣고 다니기를 도전한 적이 있는데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교인들이 바로 돌탕 아버지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아버지들의 변화는 주변의 아버지들에게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쳐주기 시작했다. 돌탕목회의 영향권은 지난 세월 손 댈 수 없었던 한국 아버지들의 거친 언행을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며 가족을 끌어안게 한 것이다. 이보다 더 소중하고 강렬한 영향력이 있을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