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인식목사 연재 목회칼럼

손인식 목사 연재 목회칼럼 5회 '오, 인간이여' 1

 

세상에 사람처럼 복잡한 존재가 없을 것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도 얼굴 몇 개 정도는 갈아 끼며 사는 것이 인간이다. 차라리 동물들은 단순하다. 착하면 언제나 착한 동물이고 잔인한 야수는 언제나 야수인 것이다. 그러나 목회하면서 보면 사람은 달랐다. 아주 착해보이던 사람도 나중 보면 그렇게 고약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정말 힘들어 보이던 사람도 나중 보면 그렇게 선하고 호인일 수도 있는,..그런 이중적 존재들인 것이다. 목회는 바로 그런 인간론을 전제하고 기독론으로 방향을 잡아 구원론이라는 전인적 중생으로 성령론을 바탕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목회 발자취를 돌이켜 보며 빼놓을 수 없는 표현이 오, 인간이여! 라는 묘사이다. 인간은 그 죄성으로 인하여 정말 치사하고 더럽고 악하고 믿을 수 없는, 그래서 오, 인간이여! 라고 하는 탄식의 대상이다. 그런데 비해 성령 안에서 변화되는 인간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었고 바랄 수도 없었던 새 피조물로 변하며 오, 인간이여! 라는 감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 오, 인간이여! 의 탄식과 감탄, 절망감과 기대감 사이에서 지난 23년의 베델목회, 즉 돌탕목회를 해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오, 인간이여! - 자유하는 자유인


오, 인간이여! 라는 감격과 감탄은 주로 인간이 갖지 못했던 새로운 자유를 돌탕들의 삶에서 보게될 때 나오던 감탄이다. 한 마디로 신앙은 자유이다. 하나님 앞에 자유해지고 죄에서 자유하고 죽음에서 자유하고 두려움에서 자유하고 의를 향해 목숨 바치는데 자유해지게 하는 것이 신앙의 힘이다. 사랑하는 자유, 예배하는 자유, 용서하는 자유, 섬기는 자유, 축복하는 자유가 넘치는 새로운 피조물들을 돌탕목회를 통해 바라보며 오, 인간이여! 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자유 때문에 돌탕목회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섬기는 것, 낮아지는 것, 나눠주는 것, 예수를 전하는 것, 교회의 직분에 얽매이지 않는 것,..등등이 새로운 자유로 들어나게 되었고 거기에는 이중성이나 위선이 없었다. 오, 인간이여!를 감격적으로 외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예수 안에서 그같은 자유를 누리느라고 바빴고 재미있었고 행복할 수 있는 돌탕들이었다. 내가 얼바인의 베델한인교회에서 돌탕목회가 본격화되면서 누렸던 새로운 모습의 자유 중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자유를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승복하는 자유


돌탕들의 정말 신선한 자유는 어떤 회의에서나 토론 가운데 마음의 동감이 오면 자기 의견이라는 깃발을 내리고 모두가 내린 결론에 승복하는 자유였다. 이것이 자유 중에도 얼마나 중요한 자유인지 늘 깨달을 때가 많다. 그런 종류의 자유를 내가 섬기던 베델한인교회 성도들 속에서 시시때때로 볼 수 있었던 돌탕목회가 참으로 행복했다. 물론 무조건 자신의 의견을 폐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의견은 여러 의견 중의 하나일 뿐이고 남들의 의견도 내 것처럼 존중한다고 하는 신앙인격인 것이다. 장로인데도 집사 중의 한 사람이 지혜와 성숙으로 말하는 의견을 듣고는 속으로 감복하고 겉으로 승복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담임목사의 의견을 꺽고 장로의 의견을 관철하여 목사를 견제하는 것이 장로된 사명감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교회는 전진이 멈추고 성령충만의 역사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을 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담임목사를 통해 계시하시는구나 하고 느껴지면 마음의 부담없이 목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새 자유가 온 교회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자유이며 모든 이들을 자유하게 하는 자유이다. 이런 경우들을 시시때때로 보면서 오, 인간이여!를 외치게 된 것이다. 과거에 하도 교인들에게 질리다 못해, 그 같은 새 자유를 보아도 저건 잠간일 뿐이지 저러다가 본색이 다시 나올 것이야 하는 냉소감, 환멸감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코 사람의 인격 수준이나 지식과 교양에서 흘러나오는 지유가 아니었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의 말씀대로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자유이다. 어떤 사람의 출신 대학이나 학위나 전문직에 기대를 걸고 자유하는 자유를 기다렸다면 그것이야말로 콩을 보며 팥을 기대한 것이 되고 만다. 박사인 교인, 신학교를 나온 교인, 삼대째 믿는 집안의 교인, 유명한 목사의 아들 딸인 교인, 의사나 변호사인 교인들이어서 그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의 의견을 꺽고 남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승복의 자유를 보지 못했다. 그가 누구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자 자신의 생각, 의견, 아집, 경험까지도 내 던지고 전체의 의견을 택할 수 있었던 승복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였다. 성령님이 강한 기질을 꺽어주시고 빚어주시는  신앙훈련에서 비롯된 자유였다. 돌탕으로 하늘 아버지께 돌아온 후에 새 마음, 새 눈을 뜨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돌탕들만의 특별한 자유였다. 지금도 나는 승복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신앙인들을 보게 될 때 오, 인간이여! 하는 감탄사를 외치게 된다. 


승복하는 것은 패배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다. 승복은 자유이지 굴복이 아니다. 나 역시 담임목사라는 입장이 있어도 실행위원회에서 내 의견보다 더 교회에 유익이 되는 의견을 평신도들로부터 듣게 되면 가슴이 뛰는 흥분까지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담임목사인 나의 의견까지 내려놓고 솔직하고 사심없는 평신도의 의견을 택할 때 교회에 큰 유익이 되는 경우들이 많았으며 그렇게 승복해 주는 담임목사를 오히려 존경하는 교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별난 교인을 만나 별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분은 여러 가지로 잘 갖춘 엘리뜨이며 재산도, 학력도 남들을 앞지르는 교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실행위원회 회의가 끝난 후 나와 잠시 대화하게 되었다. (베델교회는 미국 C&MA 교단에 속한 교회이어서 당회라는 말 대신에 실행위원회라는 명칭을 쓰고있다). 그가 하는 말이, 베델교회에 와서 은혜 가운데 변하여 돌탕이 되고 나중에는 실행위원회 멤버가 되면서 여러번 회의에 참석하는 중에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이분은 30명의 실행위원들이 회의 하는 중에 각자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내려놓는 것이 그렇게 놀랍더라는 것이다. 한국인 특히 한국 남자들의 자존심과 아집이 얼마나 강한지를 일생 보고 살았는데 어쩌면 저렇게 얼굴도 붉히지 않고 자기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존심을 내려놓는가 하는 엄청난 놀람이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자신에게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자기 의견보다 더 유익한 의견이 나오면 거의 자동적으로 자신의 자존심이라는 무장을 해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 한 마디로 놀라웠고 강한 충격이 내 안에 요동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승복은 성숙이다. 승복하는 자유보다 더 높은 자유는 없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끔찍한 사태나 혼란이 일어나는 많은 이유들 중에 절대적 이유는 승복하지 않는 교만 때문이다. 승복하지 못하는 부자유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일생 동안 “절대”, “반드시”, “내가 확신하건대”..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아예 “짐이 곧 국가다”라든지 “니들이 뭘 알아?”라는 개념 자체를 자기 인생에서 파묻어 버린 것이다. 승복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한 것이기도 하다. 그 분처럼 뛰어난 인품과 학식과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미국과 국민이라는 전체보다도 자신의 능력과 식견을 먼저 앞세울 수 있다는 자기 문제를 뼈아프게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승복이라는 철학이 정치가 되었고 화목이 되었고 섬김이 될 수 있었다. 


하물며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약속을 선포하신 예수의 제자들이 이 승복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가면 그가 있는 교회, 그가 사는 가정, 그가 일하는 장소는 한 마디로 지옥같이 변하는 것을 참으로 많이 보았다. 100명 중에 그 한 사람 때문에 나머지 99명이 고통을 당한다. 제직회 때마다 그것이 교회 전체가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 “내 목에 칼이 들어온들...”하면서 자기 주장을 앞세우며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도 미국내 각 도시 한인교회들 속에 오늘도 열렬히 활약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승복하는 자유는 진정 예수인을 자유하게 하는 자유이다. 복음을 위해 승복하고 교회를 위해 승복하는 한 명이 천을 이기고 만을 이길 수 있다. 그만큼 승복하는 자유가 중요하다. 이것이 돌탕목회에서 누리는 자유이다. 

 

알아주는 자유


수많은 교회들의 목회현장이 메마르고 각박하기 쉬운 것은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훌륭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없어서도 아니다. 문제는 주의 집에 함께 모여든 성도들끼리 피차에 알아주지 않는 강팍함 때문이다. 그런 교회에 처음 온 사람 입장에서 보면 따뜻함이 없고 기가 죽기 쉽다. 다시 올 마음이 없어진다. 숫자가 많은 교회를 가면 무슨 군중대회 속에 파묻힌 고독한 느낌이다. 작은 교회들 중에는 큰소리 치는 몇 사람들이 교회 문턱을 가로막는 거부감을 받게 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 한 교인만이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를 알아주시고 받아주셨다는 돌탕의식을 안고 한걸음 앞서면 그 한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알아주기 시작한다. 주변 분위기를 홱 바꾸어 버린다. 


인간이 가장 좋아하고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는 것은 교회가 크던 작던 그 속에 나를 알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더 이끌어주는 에너지가 된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들이라고 강조하신 분이 우리 구주 예수님이 아니신가!? 교회로 몰려와 주의 품에 안기기 원하는 교인들치고 귀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치있는 사람들이라고 알아주고, 어떤 사람들은 무가치한 사람들이라고 알아주지 않는다면 사단은 그런 교회를 밥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유 중에도 남들을 알아주는 자유를 마음껏 행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교회를 살리고 자기 가정을 물댄동산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에게는 남들을 될수록 알아주지 않으려는 기질이 강하다. 본성이라고까지 말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목말라 하는 일종의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이것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찬가지 현상이다. 부부 사이에서도 너는 알아주지 않으면서 나는 알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부부위기의 한 유형이다. 목회 현장에서 수도 없이 보고 또 깨달은 것이 이처럼 막혀버린 상대적 자유의 한계였다. 그런데 베델교회에서 돌탕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 새로운 기류가 교회 안에 형성되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알아주기”의 따스한 영적 분위기였다. “장로님, 오늘 주일예배에서 기도하실 때 부흥회와 같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는 한 마디의 알아줌 앞에서 기도 인도자는 붕 뜨는 것 같은 흥분을 느낀다. 더 열심히 기도생활을 파고든다. 어느 부목사님이 모처럼 설교하신 날, “오늘 목사님의 설교는 왜 그렇게 내 마음 문을 열게하던지,..참 신선했습니다!” 라고 “알아주기”라는 자유를 행사한 적이 있다. 이 담임목사가 한마디 던진 그 “알아주기” 자유 앞에서 그 부목사님은 그날부터 일생의 설교자로 대단한 자기 부흥을 시작했고 얼마나 은혜로운 설교를 계속하고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단순히 칭찬 한 마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알아주셨고 세례요한을 알아주셨고 무화과 나무 아래 있던 때부터 나다나엘을 알아주셨던 것처럼 “알아주기”는 한 존재의 잠재력과 가치와 하나님의 목적까지 인정하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친구관계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돌탕이 시작한 “알아주기”의 자유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그 여파가 크고 강력하다.     


나를 알아달라고 제직회에서, 장로투표 자리에서, 남전도회 회장 취임식에서,..야단법석이 난 교회에서 무슨 신령한 하늘 잔치가 열리는 것을 보았는가?! 돌아오는 탕자를 즉시 알아주시며 품에 안아주신 하늘 아버지처럼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얼굴들을 알아주는 돌탕들의 교회가 지난 23년 세월동안 베델교회를 뒤집어 놓았다. 내가 인도하던 목회자 세미나에 참가했던 여러 젊은 목회자들을 뒤집어 놓았다. 목회의 성패는 담임목사가 교인들을 “알아주는 자유”에 달렸다고 하는 도전을 받아들인 분들이다. 그 중의 한분이 섬기는 한인교회는 오늘날 미 동부지역에서 다 칭송하는 그런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알아달라고 요구하면 더 안 알아주는데 내가 당신들을 알아주겠다고 마음을 열면 거꾸로 전 교회가 나를 알아주고 하나님이 알아주신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인 비밀이며,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가난한자, 소외된 자들을 알아주셨던 예수님의 자유를 사용하는 제자의 삶이 되는 것이다. 알아주는 자유를 주저없이 사용하는 돌탕들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온 말이 오, 인간이여! 이었다. 그것은 최대의 감탄이었다.  

 

받아주는 자유


신앙의 자유 중에는 “받아주는 자유”라는 차원의 세계가 있다. 교인끼리, 부부끼리, 부모와 자식 간에, 교회와 교회 사이에, 증발해 버려서 오늘날 교회와 가정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자유의 실종이었다. 나 아닌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자유가 주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되찿고 회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받아주는 자유”이다. 생각해 보자! 이유만 있으면 받아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생긴 모습이 싫어서, 출신 고향이 싫어서, 잘난체 하는 것이 싫어서,..안 받아주고 거부한다. 심지어 “왕따”를 만든다. 베델 교인 중의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라는 이유로, 더구나 형이 들어간 대학에 훨씬 못미치는 대학을 들어간 자신의 부족 때문에 얼마나 부모가 자기를 냉대하고 받아주지 않았는지 그 원통함이 뼛속 깊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원통함의 보상으로, 부모를 향한 보복으로,..40이 넘은 그 나이에 도박에 빠져 있었다. 그를 상담하는 과정에서 몇 번 느낀 것은 부모가 자기 아들을 받아주지 않은 탓에 생긴 문제들을 이제 와서 목사가 상담해 주느라고 별 고생을 다 한다는 허탈감이었다. 


그런데 오, 인간이여! 라는 감격이 솟구친 것은, 돌탕으로 새 삶을 시작한 남자와 여자들이 그 편협했던 거부의식을 벗어버리고 남을 받아주기 시작하는 자유를 볼 때였다. 부모가 자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자유였다. 부부간에 상대방을 “받아주는 자유”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부부 간에 존재하던 갈등과 조건들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는데 사람이 먼저 변한 것이다. 베델교회의 돌탕목회 현장에서 이 자유를 참 많이도 보았다. 어느 분의 표현대로 인간은 받아주어야 하는 제목보다 안 받아주어야 하는 제목을 열배 이상 갖고 사는 복잡한 존재들이다. 부부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부부가 피차에 장점 10가지를 적어보라고 하면 대부분 얼굴이 굳어지고 그 열 가지를 채우지 못해 쩔쩔매는 것을 많이 보았다. 솔직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안타깝고 괴로웠다. “내”가 “너”를 배척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시작된다. 배우지 않고 훈련받지 않아도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남들을 배척하며 성장한다. 그것이 사람의 속성이고 죄성이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께 돌아와 돌탕이 되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면 그 때부터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배척하려는 직감보다도 영접하려는 영감이 신선하게 꿈틀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싫다!가 좋다!로 변하고 배척의 전문가였던 사람이 영접의 전문가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돌탕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때 그 교회는 서로 받아주는 교회가 되고 피차에 받아주는 자유가 흐른다.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서로 받아주는 화목으로 얼굴들이 빛난다.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훨훨 짐을 벗어버린 자유를 느끼는가? 받아주는 것은 배척하는 것보다 몇 곱절 삶을 풍성하게 하고 윤택하게 한다. 세상 시민보다 천국시민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은 이처럼 “받아주는 자유”에 달린 것이다.


교회 목양을 하다보면 자기 스스로 고고하게 의인이 되어 마음도 안 열고 인생도 안 열고 사랑도 안 여는 교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왜 그렇게 사는가? 심지어 어떤 때는 저분은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자신을 믿는 사람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십자가의 구속이 무엇이며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쇠덩어리처럼 단단했던 자기 마음의 철문을 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예수 앞에 용서받은 죄인으로 새 이름을 받고 새 노래를 부르고 새 언어를 말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마음을 닫고 남들을 배척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거부하며 목회자를 배척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가?! 한 마디로 옛 성품에 묶인채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걷어찬 사람들이다. 반면에 “받아주는 자유”는 자신을 열어주는 자유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열고 교만과 아집을 열고 절망의 창살을 열어버린 돌탕들이 행하는 자유가 바로 남들을 받아주는 자유이다. 받아주는 자유는 곧 자신을 열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나를 열줄 모르면 남들을 받아주지도 못한다. 
사도행전 2장은 예루살렘에 처음 태어난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자유롭게 받아주는 성령 공동체를 보여준다. 신비하고 신기하다. 서로 함께 기도하고 찬미하며 떡을 떼고 물건을 서로 공유하는 역동성이 넘치는 초대교회의 장면이다. 그곳에는 이게 싫고 저게 싫다는 그 어떤 느낌이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받아주니까 다 좋은 것이다. 문제는 받아주는 자유에 달린 것이지 각자의 배경이나 삶의 발자취 또는 서로 다른 취향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교회 오면서 진한 썬글라스를 쓰고 와서 눈에 좀 거슬려도 저분에게 그럴만한 문제가 있겠지 하고 받아주면 그만이다. 나중에 보니 안과의사의 처방 때문이었다. 진한 색깔의 모자를 쓰고 나타난 여성 한분이 있어도 문간에서 활짝 웃으며 받아주면 그만이다. 지나간 후에 수군거릴 필요가 없다. 나중에 보니 항암치료를 받아 머리가 다 빠진 여성이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취약한 것이 서로를 받아주고 좋아하는 자유이다. 받아주는 자유야말로 주의 집에 찿아온 성도들을 위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현장이 되는 것인데 그 귀한 자유보다는 째려보고 못마땅해 하고 흠을 잡으며 교회생활을 써늘한 광야처럼 만들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되찿아야 할 자유는 “받아주는 자유”이다. 돌탕목회는 받아주는 목회가 되었다.  

 

생각을 바꾸는 자유


돌탕들이 모여 간증할 때 보면 공통적인 것 중의 하나가 자기 생각을 바꾸는 자유였다. 자유한 사람인 것 같은데 마치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들처럼 손과 발에 가느다란 줄이 묶여있다고 가정하자! 과연 그가 자유하는 사람인가? 사람은 제 각각 자라난 배경과 성품과 환경 속에서 생각을 만들었다. 생각이 모여 사고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줄이 되어 한 사람의 생각을 잡아 댕기며 끌고 다니는 것이다. 이 생각하는 패턴이 자유하지 않고는 누구도 진정 자유할 수가 없다. 내가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된 것 중의 가장 큰 자유는 생각을 바꾸는 자유였다. 돌아온 탕자처럼 주 아버지 앞에 돌아오면서 그때까지 내 손과 발을 보이지 않게 단단히 묶고 있던 내 속의 생각들을 바꾸는 자유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롬 8:1-2이 선포하는 자유였다. 하필 장로의 집에서 태어나 숨을 못쉬도록 성경과 성수주일이란 틀안에서 자라야했다! 라는 불행한 생각이 나의 청소년기를 누르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해방되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남이 못받은 축복인지 생각이 바뀌었다. 결혼한 후 늘 지켜온 생각이, 아내는 나의 귀찮은 잔소리꾼이었는데 생각을 바꾸고 보니  그녀는 나에게 귀한 충고를 주느라고 수고가 많은 삶의 동반자였다. 그렇게 생각을 바꾼 다음부터 아내를 향한 나의 생각이 놀랍게 자유해졌다. 생각을 바꾸니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황해도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서울 변두리 천호동에서 나 역시 피난민의 아들로 자라난 것은 부끄럽고 수치될 것이 없었다. 전능자 아버지 품에 돌아와 생각이 자유를 누리면서 깨닫고 보니 그 척박한 천호동 산 기슭에서 성장한 것이 내게 복이었다. 그곳에서 자라나며 체험했던 산과 들과 가난과 배고픔들은 오늘의 내 목회생활에서 가장 풍성한 정서와 감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생각을 바꾸는 자유는 나를 긍정하게 만들었고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는 자유를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돌탕 공동체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생각을 바꾸는 자유”일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예배 드릴 때 앞에서 찬송을 인도하는 것은 부목사들이고 설교하는 이는 담임목사라는 고정관념이 뿌리내려 있다. 그러나 나를 돌탕 만드셔서 목사까지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예배 찬송을 돌탕이며 담임목사인 내가 직접 손을 들고 인도했다. 중간 중간에 감격하는 멘트까지 말해가며 마치 성가대 지휘자처럼 손을 흔들어가며 회중이 찬양대가 되게 하였다. 많은 새가족들이 처음엔 그런 나를 부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 알았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베델교회 교인들의 생각은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가!를 회상하게 된다. 고정관념이라는 생각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재정팀장이 언제나 장로였는데 어느 해부터 안수집사로 조정했다. 돌탕들로써 생각을 바꾸는 자유가 없었다면 큰 이슈가 될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었다. 사역장로가 기꺼이 집사가 팀장으로 있는 사역팀에 한 사람의 부원으로 들어가 팀웤을 이루었다.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교회 청소를 담당하던 집사님 한분이 안수집사로 선출되었다. 생각이 자유를 누리면서 교인들이 선출한 것이다. 아내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일본인 한 사람이 그렇게 신실하게 예배하고 섬기더니 어느 해 교인총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었다. 생각을 바꾸는 자유를 돌탕들이 주도한 것이다. 4700개가 넘는 미국의 한인교회들 중에 첫 일본인 장로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일본인이지만 교포교회인 우리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의 전환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이라는 감옥에서 교회를 해방시키는 자유이다.    

 

버리는 자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하는 해방, 그것은 곧 자유이다. 아버지 품에 돌아와 돌탕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 “버리는 자유”를 시작한다. 음란을 버린다. 물론 술과 담배도 버린다. 아내에게 손찌검하던 야만적인 성질도 버린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려고 힘을 다한다. 자존심을 버린다. 모든 교회 공동체,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 원인은 대부분 자존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힘이 주는 자유이다. 이 자유가 교회의 부흥을 일으킨다. 성령의 충만을 누리게 한다. 예배의 기쁨이 흘러넘친다. 가정의 위기가 치유를 받는다. 자존심을 버리게 하는 성령의 역사야말로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오죽하면 어느 목회자의 입에서 “망할 놈의 자존심”이라는 표현까지 나왔을까?! 교회를 섬기고 회의를 하고 의견을 나누다보면 반드시 부딪쳐야 하는 벽이 각자 높이 쌓아놓은 자존심이라는 벽이다. 이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전도, 선교, 교육, 비전을 나눈다는 것부터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때가 많다. 수많은 교회들의 재정위원장, 성가대 대장, 당회서기, 건축위원장, 주일학교 교장, 심지어 담임목사 등등이 왜 그 많은 문제들의 생산지가 되고 있는가? 한 마디로 그 강한 자존심들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서고 교회에 맞서고 교인들의 뜻에 맞서는 원인배경은 그 유명한 자존심들 때문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버리는 자유”야말로 모든 성도들의 자존심을 무장해제시키는 최고의 자유이다. 


지난 세월 베델한인교회의 목회현장을 뒤돌아보면 주의 교회를 위해 자존심까지도 헌신짝처럼 버린 돌탕들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 부흥과 기적들을 부어주셨다. 반면에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에 목숨을 건 사람들 때문에 그 강력한 교회의 하나됨에 찬물을 끼얹는 아픔들도 맛보았다. 이것은 결국 돌탕이냐, 들탕이냐의 갈림길을 맛보는 쓰라림이기도 했다. (들탕은 들 돌아온 탕자, 돌아오다가 멈춰버린 탕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오, 인간이여!라는 감탄사를 오, 인간이여! 라고 하는 신음소리로 바꾸어야 할 상황을 여러번 맞이했다. 다음 호에서 가슴 아팠던 “오, 인간이여!”를 다루려고 한다.